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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8 00:15:50
송 현
월간 중앙 2003년 7월호 인터뷰 자료
[이사람이 사는법]괴짜 詩人 송현
‘전방위 투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지난 4월 이라크전쟁이 한창일 무렵 인터넷에는 뜻밖의 광고가 떴다. 이라크 파견 민병단 모집. ‘이라크민병대 합류 한국민간참전단 발족준비위원회’라는 단체 명의였다.

우리 정부가 ‘국익을 위해’ 미국 편을 들어 정규군을 파견하기로 한 마당에 미군과 싸우는 이라크 민병대에 지원해 참전하는 의용군을 모집한다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광고를 본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웬 도깨비짓인가 하며 입가에 실소(失笑)를 머금었을 것이다. 심정적 차원에서는 그러나 동조의 눈길을 보낸 이들도 적지 않았다.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부연설명에도 불구하고 ‘국익’보다는 ‘반전’(反戰)·‘반미’(反美) 혹은 ‘평화’ 같은 단어들이 당시 사회적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의 조기 종결로 실제 민병단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단체는 그동안 모은 300만원의 협찬금으로,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분쟁지역에서 활동해온 사진작가 성남훈 씨를 이라크 현지로 파견했다. 전후 이라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려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우자는 뜻에서였다.

돌발성 해프닝으로 끝난 이 과정에서 조금은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파견단장 송 현(56). 시인이자 모 스포츠신문의 성(性)칼럼니스트였다. 여러 신문을 광고까지 찬찬히 뜯어보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만한 이름이었다. 지난해 모 결혼중개회사의 광고에 그의 공개 구혼장이 크게 실렸기 때문이다.

최근의 이 두 가지 사건 외에 그는 20여 년 전에 이미 세상에 꽤나 자신의 이름을 알린 바 있다. 1970년대말 3벌식이니 4벌식이니 5벌식이니 하며 세간을 한창 시끄럽게 했던 타자기 자판싸움.

그 시대를 기억한다면 ‘아하! 그 사람’ 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당시 타자기의 대부로 알려져 있던 공병우 박사와 함께 자판싸움의 한가운데 서 있던 주인공이 바로 송씨였다.

본론은 다음으로 미루고 이참에 그가 지니고 있거나 지녔던 직함들을 한번 살펴보자. 우선 위에서 소개한 시인·성칼럼니스트가 있다. 동화작가이자 지금은 도서출판 명상의 출판고문이며 법인인 ‘건강미디어왕국’의 CEO다. CEO 경력은 또 있다.

그의 나이 31세 때 그는 공병우타자기(주)의 사장을 지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는 부산 모 여중과 서울 서라벌고의 국어교사 노릇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5년여 동안 정치판에 적을 두기도 했다. 그 사이 사이 “먹고살기 위해” 여러 지면에 잡문을 뿌려댔으며, 방송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 순간 최선 다해 모든 것을 다 쏟겠다”

약간의 억지를 써서 이들 직업을‘글’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꿸 수 있다거나, ‘직장’(職場)보다 ‘직종’(職種)이 중시되는 사회 분위기라는 핑계를 대더라도 이 정도면 참으로 다양한 삶을 살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이런 그를 보는 세상 사람들의 눈은 다소 기울어 있다. 너무 이것 저것 집적대고, 엉뚱한 일을 자주 벌인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 자신도 이런 세간의 시선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지난 의약분쟁 때의 일이다. 양쪽의 힘이 팽팽히 맞서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며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는 서양의학을 배운 약사들에게 동양의학을 맡긴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평소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두 차례에 걸쳐 직접 모 일간지의 광고 지면을 사 자기 의견을 실었던 것이다.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그가 한쪽 편을 들고 나오자 당연히 익명의 모진 협박 전화가 쏟아졌고, 그때마다 그는 “나는 광고에 내 이름을 당당히 밝혔으니 얘기하고 싶으면 이름부터 밝히고 얘기하라”며 맞섰다.

사태는 결국 약사들의 파업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일반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정부는 약사회장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 가만히 있지 못했다. 다시 광고 지면을 산 그는 이번에는 약사회장을 구속시키기보다 어정쩡한 정책으로 원인제공을 한 보사부 장관을 구속시키라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그가 건네준 문건의 제목이 생각났다. ‘청와대와 송 현의 싸움’이다. 또 있다. 그의 장한동 개인사무실에는 김영삼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그는 사진과 문건의 내력을 말하면서 자신의 행동은 결코 튀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특별한 신념이라도 있느냐고 묻자 신념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그냥‘정의감’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방위 정의감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송 현이 사는 원칙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죠.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저의 모든 것을 다 쏟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도 ‘처음 만날 때처럼, 다시 못 볼 것처럼’ 대합니다.”

그의 복잡한 이력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단식’이다. 그는 매년 하루씩 네 번 단식한다. 자신의 삶에 크게 영향을 준 네 사람의 기일(忌日)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정신적 스승인 함석헌 선생과 영적 스승인 라즈니쉬, 제자로 만나 나중에는 동지로 20여 년을 함께 싸운 공병우 박사, 그리고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 줘 저의 열정과 생각들을 발표하게 해준 ‘뿌리깊은나무’의 한창기 사장이 그분들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이들 4명은 그의 삶 곳곳에서 그 앞에 나타나 그의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주기도 하면서 지금의 송 현을 구축했던 셈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라크 파견 민병단 모집이라는 일을 벌인 것도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그는 말했다.

엉뚱한 발상에서 시작한 행동이 아니라 진지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얘기였다. 최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낸 소위 ‘송 현의 섹스이론’도 영적 스승이라고 여기는 라즈니쉬의 영향이 한 자락 깔려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가 이처럼 진지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워낙 여러 방면으로 주저 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지함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동화작가 중 가장 많이 팔려 나간 작가입니다. 지난 1992년 발간을 시작한 도깨비학교 시리즈는 무려 400만권이나 팔려 나갔습니다. ‘쥐돌이의 세상 구경’은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우량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오덕 선생을 중심으로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를 결성해 3, 4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런 내게… 아동문학가가 아니니 다른 데로 가라고 합니다.”

그의 항변을 염두에 두고, 네 명의 스승의 그림자를 좇아 그의 이력을 따라가 보자. 네 명의 스승 가운데 처음 만난 사람은 함석헌 선생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 잡지를 통해 함석헌 선생을 만난다. 화보에 두루마기를 입은 함석헌 선생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선생이 막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침 선생이 쓴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송 현은 이 책을 구해 읽으며 선생의 사상에 함빡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함석헌 선생이 부산 송도복음병원장으로 있던 장기려 박사 댁에서 매월 1회씩 성경 모임을 이끌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당장 찾아가 선생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선생의 사상과 삶을 몸으로 따라 했다.

1974년 한신대생과 교수들이 유신 체제에 반대하며 항의 표시로 전원 삭발하고 함석헌 선생도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삭발했다는 풍문이 들렸다. 당시 부산 모 여중 교사였던 그는 이 풍문을 듣자마자 ‘선생과 함께하지는 못할 망정 박수는 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삭발을 단행했다. 비틀즈가 한창 주가를 올릴 때여서 우리나라에서도 장발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선생과의 인연은 그가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가톨릭 여성회관에서 매월 3회 열리던 선생의 성경 강의에 그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할 정도로 열성적인 팬이었다.

img2R“명동구국선언 기억하시지요? 선생은 사건의 핵심이었습니다. 당시 구속을 앞두고 있던 선생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를 하셨던 것 같아요. 퀘이커 교도로서 세례에는 관심이 없어 하셨는데 성경 모임에 오셔서 ‘세례받고 싶은 사람은 나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 제가 선생에게 세례받은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그의 서울 진입기를 들어 보자. 삭발 사건이 있고 얼마 후 그는 서울에 살던 한 지인과 서로 안부를 묻던 중 서라벌고에 국어 교사 자리 하나가 비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침 더 넓은 세상을 꿈꾸던 그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무작정 상경해 그 길로 서라벌고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교문 앞에서 막혔다. 초라한 행색으로 교장을 면회하겠다고 하자 수위는 연락도 취하지 않고 길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한참을 옥신각신해도 수위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결국 부산에서 왔는데 교장 선생님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교문 앞에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수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교장실로 연락을 취했다.

그를 맞은 교장의 눈초리도 편하지는 않았다. 책 외판원쯤으로 생각하고 적당히 구슬려 돌려보내려는 눈치였다. 그런데 불쑥 들어와 하는 첫마디가 “채용해 달라”였다. 교장의 눈초리는 더욱 차가워졌다.

“당연했죠. 한 마디로 ‘또라이’나 할 일이었습니다.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죠.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줄 증거를 가져왔다’며 들고 간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가 4년 반에 걸쳐 쓴 소설 원고였다. 될 일은 아니었다. 당시는 교사 자리 하나에 몇천만 원의 뒷돈이 오간다는 류의 기사가 심심찮게 신문지상에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만큼 사립학교의 경우 교사로 채용되려면 엄청나게 로비를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일류대 출신이 아니거나 특별한 연고가 없으면 사립학교 교사 자리는 아예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지못해 원고를 몇 장 들쳐보던 교장이 불쑥 한 마디를 던졌다.

img3L“수업을 한번 들어 봅시다.”
뜻밖이었다. 사실은 그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교장은 그를 데리고 한 교실로 찾아가 학생들에게 사정을 말하고는 그에게 분필을 넘겼다. 교무 선생과 다른 국어 교사 1명이 함께 참관했다. 어떻게 한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채용 여부가 걸린 수업이어서는 아니었다. 지론처럼 매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열정적인 성격 탓이었다. 수업후 교실 문을 나서자 교장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송선생님, 모시겠습니다.”
로비는커녕 담배 한 갑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서라벌고 교사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그에게는 많은 의미 있는 일들이 벌어졌다. 우선 서정주 선생의 추천으로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첫번째 결혼도 이 시기에 했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날 서울 경복궁 근처로 일을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한 지하 다방에 들르게 됐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인이 너무나 예뻤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만큼 선생이라는 직업을 원망한 적이 없다고 했다. 가진 것 없는 자신을 돌아보니 감히 그 여인에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옳은 일에는 정의감을 앞세우며 불쑥불쑥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던 그였지만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기만 했다.

애꿎은 물만 축내며 신세를 한탄하던 그는 결국 한 시간여를 망설이다 용기를 내 여인을 불렀다. 그리고 겨우 한다는 말이 “시간을 주신다면 차 한잔 대접하고 싶다. 기회를 달라”였다. 그러고는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다방을 나왔다. 막연한 기다림이었다. 오지도 않는 전화 확인에 학교 사환 아가씨만 입이 아파야 했다.

그러기를 한 달여. 역시 하는 마음으로 포기하려는 즈음 여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다릴 테니 일과 후에 보자는 여인의 말을 막은 그는 당장 조퇴를 하고 여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당초의 약속처럼 차 한잔을 함께 마시고 돌아왔다. 다시 만나자는 기약도 없이 돌아서는 그의 마음은 만 갈래로 찢어졌다. 다행히 며칠 후 여인에게서 다시 전화가 오고, 그런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은 친해졌다.

마침 그 무렵 그는 첫시집을 발간했는데 “반의무적으로 책을 사준 제자들 덕분에” 초판이 매진되었다. 얼마간 돈도 생기고, 그제서야 그는 결혼하자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이토록 열정적으로 이뤄낸 결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45세 되던 해 이혼했다.
“사람은 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함께 산 사람인데… 나쁜 말을 할 수는 없죠.”

등단과 결혼. 하지만 이 두 가지 사건보다 더 진하게 남아 있는 학교생활의 추억은 따로 있다고 했다. 어느 해 식목일이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학생 하나가 찾아왔다. ‘약간의 돈을 추렴해 학교에 기념식수를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함께 한 삽 뜨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마음을 북받치게 한 일은 식수를 막 끝냈을 때 일어났다. 한 학생이 그때까지 숨겨놓았던 팻말을 가져와 꽂는데, 거기에는 ‘송 현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나무를 심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더욱이 그 사건의 주동자는 평소 문제아로 소문나 있던 학생이었다.

“밥만 먹여 주면 공박사와 자판 연구하겠다”

그 무렵 그는 타자를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자판이 공병우식, 김동훈식, 표준식 등 타자기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특히 정부에서 표준자판이라고 정해 놓은 것을 보니 너무도 비합리적이고 엉터리였다.

“정의감 넘치는 젊은이로서 열받잖아요.”
그때 그는 또 다른 원인으로도 ‘열받고’ 있었다. 어느날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유행가 가사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한창 인기가 높던 송창식이 부른 ‘고래사냥’이었다. 살아 있는 교재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수업 시간에 노래 가사를 주제로 강의를 했다. 그런데 그 노래가 1주일 후에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

한번은 또 신동엽 시인의 작품인 ‘금강’을 시 낭송 시간에 강의했다. 그런데 이 시가 며칠 뒤 또 판금조치당하는 것 아닌가. 군사독재가 극성을 부리던 당시 학교 자체 프로그램에 따라 동료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에서 주제를 ‘현대 사회와 체 게바라’로 정할 정도로 생각에 거침이 없었던 그로서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불만이 쌓여가던 어느날 그는 동료 교사들과의 사석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밥만 먹여 주면 차라리 공병우 박사와 자판이나 연구하겠다. 아무 뜻 없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이 흘러갔는지 며칠 후 공박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공박사가 물었다.

“그런 말을 했나?”
공박사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왈칵 겁이 났지만, 안 했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공박사는 즉석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공박사의 나이 당시 70세였다. 더욱이 한글기계화연구소는 공박사의 개인 연구소에 불과했다. 손재주가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꼬리를 뺐지만 공박사는 머리만 있으면 된다며 결심을 재촉했다.

img4R부인은 물론 반대였다. 동료 교사들도 말렸다. 그러자 묘한 오기가 발동했다. 누구는 나라를 위해 목숨도 바치는데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마당에 밥 굶을까봐 뿌리치면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공박사를 만나 월급봉투를 건넸다. 공박사는 “그만큼 주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고용계약서를 썼다.

나중에 보니 휴가는 1년에 고작 7일에 보너스도 없었다. 여름·겨울방학에 보너스까지 두둑했던 교사직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이의를 제기하라고 당부했다. 눈물까지 보이는 부인 앞에서는 그러마 했지만 그는 끝내 공박사에게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글기계화연구소 부소장으로 2년 가까이 열심히 일했다. 그 모습이 공박사의 눈에 들었는지 어느날 공박사가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공병우타자기(주)의 대표이사 사장을 맡으라는 얘기였다.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이후 그는 타자기 자판싸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직접 나서서 독재정권과 싸우는 대신 다른 데서 열심히 일함으로써 독재와 맞서겠다는 생각이었다. 먼저 싸움을 건 것은 그였다. 청와대로 표준자판의 문제를 조목조목 비판한 건의서를 보냈다.

대답이 없었다. 그는 보다 강한 어투로 다시 건의서를 보냈다. 이렇게 시작된 정부와 그의 자판싸움은 청와대를 거쳐 주무부처인 과기처로 옮겨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몇 번의 서류 왕래와 직접 대면 등으로 이어진 싸움의 결과는 ‘일고의 가치도 없음’이라는 답변이었다.

이 같은 그의 외로운 싸움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뿌리깊은나무의 한창기 사장이었다. 한사장은 “지면을 줄 테니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라”며 그의 힘을 북돋워 주었다. 그에게는 천군만마였다.

‘어느 관료와의 다툼’이라는 제목으로 글이 나가자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본격적인 자판싸움이었다. 그는 이 싸움의 전면에 나서서 좌충우돌했다. 훗날 공박사가 그의 자서전에서 ‘송 현은 100만 원군’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신사가 찾아와 “고군분투하는 것을 알고 있다”며 자신이 도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 종로지역구 국회의원이던 정대철 현 민주당 대표였다. 3시간에 걸친 브리핑이 끝나자 정의원은 “정치생명을 걸고라도 돕겠다”고 나섰다. 그러고는 정식으로 국회에서 자판 문제를 거론하기로 하고 그 준비에 들어갔다.

이제는 뭔가 문제가 풀리겠구나 하던 그의 기대는 그러나 여지없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얼마 후 10·26이 터지고 국회가 해산된 것이었다. 정의원은 정치규제를 당해 미국유학을 떠나고 자판 문제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때의 정의원과의 인연으로 그는 본의 아니게 정치에 발을 담그게 된다.

1985년 2·12 선거 때 서울 종로지역구는 50여 일 전 창당해 정치권 변화의 핵으로 떠오른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가 출마함으로써 전국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민주정의당에서는 이종찬 의원, 여기에 정의원이 가세했다.

이때 그는 정의원의 선거 문안을 만들어 줬는데 정의원측에서는 한 술 더 떠 찬조연설을 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며 거절했지만 정의원측에서는 이미 그를 찬조연설자로 인쇄한 문건을 뿌려놓은 상태였다.

선거 결과는 정의원의 3등 낙선이었다. 그러나 한번 코가 꿰인 그는 쉽게 정치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량이 된 정의원이 자신의 연구소를 맡아 계속 도와달라고 부탁해온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이후 4년 동안 정의원을 돕다 1989년 정의원이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자 미련 없이 정치권을 벗어났다.

그 무렵 그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통해 그토록 고대하던 표준자판 폐기에 성공한다. 도미했던 공박사가 친북계 교포신문인 ‘독립신문’에 타자기 30대와 식자기를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 이를 들은 우리측 기관에서는 공박사를 설득하다 실패하고 그를 찾아와 “당신이 말리면 될 것이니 기증 약속을 취소하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 때다 싶어 “표준자판이 잘못 됐다는 것을 인정하면 공박사를 설득하겠다”고 버텼는데 뜻밖에도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요구 때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얼마 후 표준자판이 폐지되고 그 대안으로 2벌식 자판이 등장했다.

문제는 그가 보기에 2벌식 자판이 표준자판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무엇보다 2벌식은 자음을 치면 그것이 초성인지 종성인지를 인지할 때까지 임시로 기억해 둬야 하는데, 그만큼 복잡하고 많은 용량이 필요해 구조적으로 낭비가 심하다는 것이다. 한참 낙담하고 있는데 공박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끝나지 않은 전쟁’ 자판 논란

‘때려치우자. 여기서 보니 컴퓨터산업이 번창하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뒤를 봐 줄 테니 건너와 컴퓨터를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자판싸움을 계속하겠다는 생각에서 공박사의 제의를 거절했다. 얼마 후 공박사도 귀국해 비원 앞에 한글문화원을 설립하고 한글기계화운동에 새로운 불씨를 지폈다. 그는 이 건물 한 구석에 책상 하나를 얻어 뜻을 보태기로 했다.

이후 공박사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그는 자판싸움에서마저 비켜서 있었으나 공박사 사후 그의 주기마다 사람들을 모아 공박사를 기리는 한편 인터넷 등을 통해 자판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설계한 자신만의 자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자판 문제는 그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명상출판사의 출판 고문 겸 이 출판사가 주체인 건강미디어왕국(주)의 CEO를 맡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주창한 섹스론은 이 법인의 주요한 사업 아이디어다. 그가 말하는 섹스론이란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남성 위주 섹스에서 벗어나 여성 위주의 섹스를 해야 섹스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는 것이다.

그는 45세 때 첫부인과 이혼했는데, 이혼 후 만난 섹스 파트너가 소위 말하는 ‘명기’였다. 그 파트너와 즐기면서 그는 섹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그만큼 상승효과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커피포트를 보고 그는 무릎을 쳤다.

커피포트에 처음 찬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하면 15분 정도 걸리지만 일단 끓으면 다시 끓이는 데 10초면 충분했다. 여자의 오르가슴도 같은 원리임을 깨달은 그는 그날부터 오르가슴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우리말에는 오르가슴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섹스에서도 남성위주였다는 것이다.

img5L몇 번의 실험을 통해 자신의 가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한 사교모임에 나가 그동안 깨달은 ‘비법’을 처음 발설했고, 이를 계기로 모 스포츠신문에 지면을 얻어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섹스를 주저 없이 말하게 된 배경에는 스스로 영적 스승으로 모시는 라즈니쉬의 영향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가 라즈니쉬의 아쉬람에 참여해본 적은 없다.

20년 전 라즈니쉬와 관련된 최초의 번역서를 읽고 대단하다고 느낀 정도가 그와 라즈니쉬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다 1989년 불교방송과의 인연으로 불교 관련 어린이용 잡지 주간을 맡게 되면서 라즈니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잡지를 잘 만들려면 불교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대원불교대학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그동안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당시 모 출판사에서 ‘함석헌 평전’을 출판하겠다며 제게 원고를 부탁해 왔어요.

‘다른 사람은 함석헌을 학문적, 역사적으로만 접근하지만 송 현은 온몸으로 따라 하려던 사람이니 그에게 원고를 맡기자’고 했다더군요. 존경하던 분의 평전을 쓴다는 일이 기뻐 두말 않고 승낙했지요.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선생의 말씀이 그때까지 제가 받아들였던 뜻과는 다르게 들리더군요.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평전 쓰기를 포기하고 이미 받았던 계약금을 돌려줬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야 ‘젊은날에 만나야 할 시인 함석헌’이라는 책을 내놨습니다. 선생을 시인으로 조명한 최초의 책이죠. 이제서야 종교가·교육자로서 선생을 조명하는 책과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평전 등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이 섰습니다.”

라즈니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보니 그저 대단한 정도가 아니었다.
“저는 무엇에든 한번 관심을 가지면 아주 푹 빠져 버리는 성격이거든요. 햇수로 20여 년, 그동안 라즈니쉬에 대한 책이라면 한글로 된 번역서는 비판이든 이론이든 빼놓지 않고 다 읽었어요. 170권 정도 되나….”

그러면서 그는 라즈니쉬에 관한 책 한 권을 빼 들고 펼쳐 보라고 했다. 그 책의 여분 페이지에는 책을 읽으면서 느낀 그의 생각이 세 쪽에 걸쳐 빽빽하게 메모되어 있었다.
근엄해야 할(?) 아버지가 대놓고 하는 섹스 이야기. 이제는 알 만한 나이가 된 그의 두 자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기우(杞憂)라는 듯 그는 한 마디로 대답한다.

“딸애는 물론 딸애의 남자친구도 저의 SS이론 팬클럽 회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이들 때문에 늦게 한 이혼도 후회한다고 했다. 그가 첫부인과 이혼을 결심했을 때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은근히 걱정도 되고 해서 작은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참았다고 했다. 지금은 그때 이혼했어도 아이들한테 별 영향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혼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은 공개 구혼으로 연결됐다.

img6R한 번의 결혼과, 이어진 동거를 통해 결혼은 역시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그였지만 어느날부터인가‘진리나 깨달음으로 향하여 떠나는 순례의 길동무 같은 아내’가 필요해졌다고 했다. 결국 그는 지난해 한 월간지를 통해 ‘어느 시인의 공개 구혼장’을 던졌다.

처음 구혼장을 쓰면서 그는 많아야 50여 통의 답장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려 650여 통의 답장이 쏟아져 들어왔다. 공개구혼장을 본 한 재혼전문회사가 광고 모델을 제의했고, 그에 응해 일간지에 광고가 나간 덕분이었다. 물론 모두 구혼에 응하는 편지는 아니었다. 욕하는 편지, 격려하는 편지, 차 한잔 하자는 편지들 가운데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사람은 20여 명쯤 되었다.

차­식사­노래방­소주를 거쳐 8명쯤으로 좁혀졌을 때 그는 섹스를 얘기했다. 이 말에 4명이 물러났다. 그러나 이때 그는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었다. “분에 넘칠 정도로 멋있는 사람”. 수원에서 웨딩숍을 운영하는 11살 연하의 최정원 씨였다.

“다른 사람들은 송 현은 ‘까다롭다’고 말하는데 그분은 ‘다르다’고 말하더군요. 외모도 물론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부모가 살아 계셨더라면 정성껏 모셨을 텐데’ 하고 아쉬워해요. 보통은 반대일 듯싶은데요.”

어버이날이었던 지난 5월8일 그는 최정원 씨와 ‘서둘러’ 결혼했다. 그리고 최씨의 부모가 살아계실 동안에는 모든 여행의 목적지를 강원도로 한정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강의를 핑계삼아 강릉으로 1박짜리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원래는 자신의 책이 나오면 출판기념회 때 아는 분들을 모시고 조용히 결혼 발표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산소마스크를 쓰고 연명하는 최씨 부친을 위해 양가의 직계 친족 몇 사람만 참석한 가운데 같이 살 것을 알렸다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재혼’이 아니라 ‘새혼’이었다. 이혼율 세계 2위인 우리 현실을 고려할 때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재혼보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인 새혼이 걸맞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새혼 사업을 하겠다고 말했다. 벌써 웨딩숍을 운영하는 부인과 이미 구체적 사업계획까지 세워 놓았는데, 다른 새혼업체들과 달리 먼저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부부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섹스 강의를 의무적으로 받게 한 다음 새혼 부부가 깨지는 중요한 요인인 자녀 문제에 대한 강의까지 맞춰야 비로소 짝을 찾아 주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건실한 부부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기반인 경제 교육까지 접목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는 새 가정을 이루고 새 사업을 구상중인 지금이 자신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버리지 못해서 앞으로도 여러 가지 일을 벌이려고 준비중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섹스 이론을 통해 성인들에게 올바른 성교육을 하겠다고 한다. 또 자신에게 떠나라고 말하는 아동문학가들에게 보란 듯이 이경숙 씨의 노자 해석을 바탕으로 ‘어린이노자’를 펴낼 생각이라고 한다. 어려운만큼 비유가 필요한데 비유에서는 자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40대 초반에 60세까지 살 것으로 계산해 책 100권을 쓰고 죽으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60권을 썼고 지금의 건강으로 봐서 70세까지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200권으로 목표를 수정했다고 한다.

제목은 이미 다 정해 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50여 권의 수첩을 내보였다. 그 속에는 함석헌 선생 평전이라든가 라즈니쉬 예술론 등 앞에서 그가 쓰겠다던 책들의 목차와 개략적인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자판싸움, 이제는 타자기가 아닌 컴퓨터 키보드의 자판 문제를 새롭게 제기해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마쳐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강조했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치열하게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항복 월간중앙 (booong@joongang.co.kr)   [2003년 07월호] 2003.06.1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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